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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8일 목요일

하나님의교회에서 안상홍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이유

하나님의교회에서 안상홍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이유

하나님의교회가 안상홍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이유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성령시대 등장하신 예수님의 새이름 이시기 때문 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우리 구원을 위해 성령시대 새이름으로 오시기로 계획하시고

예언하신 시대가 되어서 우리 구원을 위해 등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의교회에서 안상홍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도 성경에 예언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분명 이 땅에 재림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예언을 살펴보시면


(히브리서 9장 28절)

이와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두번째 나타나신다는 것은 처음 모습 그대로 사람의 모습으로 오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영적으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니

두번째 나타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신다는 것이죠.

그럼 이 땅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장차 진리의 성령님께서 오시면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다른복음이 아닌 예수님께서 알려주셨던 진리를 알려주실 것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그에 관한 예언을 살펴보면



(요한복음 16장 13절)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 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그럼 진리의 성령은 누구 일까요?

성령에 대해 오해 하는 분들이 있는데 성경에서 성령은 여러 뜻으로 사용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

둘째, 하나님의 능력

셋째, 마지막시대 등장하실 하나님



첫째와 둘째의 경우는 모든 교회에서 인정하는 내용이니 지나가고

세번째 경우를 성경으로  보시면



(마태복음 28장 19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주고..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시기를

아버지와 아들와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아버지의 이름과 아들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이 있을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여호와, 아들=예수님, 성령=??



성령에도 이름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영으로, 능력으로만 존재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시대 하나님으로써 이름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내것(새언약의 진리)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언약의 진리를 되찾아 주신 안상홍님을 진리의 성령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책이기에 성경을 잘 연구하시면

하나님의교회를 세우신 안상홍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성경의 예언이 하나님의교회 안상홍님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알려주셨던 새언약의 진리가 사라질 것도 예언 하신 것입니다.

예언따라 종교암흑시기가 도래되고 하나님의 진리는 모두 다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잃어버린 새언약의 진리를 다시 되찾아 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교회 안상홍님 이시죠!!



하나님이시기에 새언약의 유월절도 회복해 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죄사함을 주신분이 안상홍님 이십니다

편견을 버리시면 성경이 보이고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이 보이고 성경이 알려주는 구원의 길이 보입니다!!

꼭히 성경말씀을 살펴 보시고 구원주러 오신 안상홍님을 하나님으로 알아보시길 바랍니다~^^

2014년 8월 27일 수요일

진정한 클라이머가 되라*하나님의 시온산

진정한 클라이머가 되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요즘, 덩달아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등산. 등산이 남녀노소 모두에게 큰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등산은 공부에 지친 청소년들에게 모험심과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인내심을 길러주고, 만족감과 자신감, 우울증을 해소하는 등 정신 건강을 좋게 한다. 정상으로 이어진 꾸불꾸불한 길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에너지 소비가 높아져 체지방 감소에 효과가 있으며, 심혈관질환의 위험을 낮춰주고, 운동부족으로 인한 만성질환도 예방할 수 있다. 또한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와 깨끗한 산소 등 몸에 유익한 성분을 흡수함으로써 몸을 정화시키고, 근력운동을 함으로써 골밀도가 높아져 골다공증을 예방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이런 일반적인 ‘등산’이 있는가 하면, 좀 더 기술적이고 전문적으로 산을 오르는 '등반'도 있다. 등반은 '암벽 등반', '빙벽 등반'이란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험준하고 난이도가 높은 산을 정복하기 위해 손과 발을 쓰지 않고서는 오를 수 없는 산을 오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등반하는 등반가를 '클라이머(climber)'라고 하는데 이들은 특별한 기술과 로프, 특수 장비를 갖추어 산을 오른다. 인정받는 클라이머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과 역경이 따르지만, 모든 어려움을 인내로 이겨내고 마침내 등반에 성공하면 전 세계인이 주목하고 찬사를 보낼 정도로 가치 있고 영예로운 일이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산에 등반할 영적 클라이머들을 기다리고 계신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시편 24:3)

마지막 때에는 여호와의 성전이 있는 시온산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산으로 알려질 것이며 수많은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들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 여호와의 산으로 올라가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올라가자. 그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실 것이며 우리는 그 진리대로 살 것이다.' 이것은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2:2~3, 현대인의성경)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신 시온산을 향해 등반에 나서며 영적 클라이머를 자처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신 시온산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엉터리 등반길에 나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방향을 잃어 시온산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곳을 향해 등반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이 계신 진정한 시온산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을 보라 네 눈에 안정한 처소된 예루살렘이 보이리니 그것은 옮겨지지 아니할 장막이라 그 말뚝이 영영히 뽑히지 아니할 것이요 그 줄이 하나도 끊치지 아니할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위엄 중에 우리와 함께 계시리니… (이사야 33:20~21)

하나님께서 위엄 중에 함께하시는 시온산의 특징은 하나님의 절기를 지킨다는 것이다. 진정한 시온산을 향해 제대로 된 등반길에 나선 영적 클라이머라면 하나님의 절기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곳이 어디인지, 무엇보다 시온산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어떤 모습으로 함께하시는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께서 기다려주시고 인정해주시는 진정한 클라이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영적 클라이머가 되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무조건 나만 믿고 따라오라는 식의 사람을 따라가지만 않으면 된다. 다시 말해, 시온산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을 따라 등반길을 나서면 된다. 구별하는 방법은 쉽다.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고 있는지 여부를 직접 보고 확인해보면 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도 인정받는 클라이머가 되기까지는 많은 인내와 고난이 따르듯, 영적 클라이머에게도 인내가 요구된다(누가복음 8:15, 요한계시록 3:10, 14:12). 어쩌면 시온산 등반은 더 큰 인내가 필요하다. 시온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들로부터 온갖 비방과 조롱과 핍박이 있어도 끝까지 견디며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인내, 진정한 하나님의 절기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감언이설과 거짓말로 꾀어내더라도 신념을 잃지 않고 오히려 제대로 된 시온산 등반길을 알려줄 수 있는 인내 말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영적 클라이머들은 세상의 클라이머처럼 한 번 등반에 성공했다고 해서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시온산에서 하나님의 절기를 한 번 지켰다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클라이머로 인정받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사야 4:3)

여호와여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시편 119:33)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24:13)

시온산 등반은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지 않으면 결코 이룰 수 없다. 그리고 시온산에 등반해서 끝까지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시온산을 등반하는 진정한 클라이머는 어쩌다 한번 하나님의 절기를 지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올 때까지, 끝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는 자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시온산을 오르는 클라이머가 되어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 영예를 얻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절기를 반드시 알고 지켜야만 한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엉뚱하게 지키고 있는 주일예배,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은 하나님의 절기가 아니다. 하나님의 절기는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절기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그 유래와 법도가 기록된 절기만이 하나님의 절기다. 하나님의 시온산에 오른 진정한 클라이머가 되기를 원한다면, 성경을 통해 직접 하나님의 절기를 알아보고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이다.

2014년 8월 25일 월요일

에베레스트를 넘는 새

에베레스트를 넘는 새 


  우리도 줄기러기 처럼 불가능을 뛰어 넘어 하늘 높이 비상하여 하늘나라 입성하는 그때까지 형제,자매 챙기며 함께 간다면 반드시 천국 가리라 확신 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의 기도의 정석

약 150년 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의 일이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해방을 내걸고 북군을 주재하며 남군과 대치했다. 하지만 남군을 쉽게 굴복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남군에 의해 북군이 치명타를 입고 있었다.

죽어가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가슴 아파하던 링컨은 이 전쟁이 사람의 힘으로 종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하나님께 기도했다. 대통령이 기도에 매달리자, 측근의 각료들은 자신들도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달라는 기도를 하겠다”고 청했다. 그러나 링컨은 정색을 하면서 “그런 기도는 아예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대통령이 흔쾌히 승낙할 줄 알았던 각료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링컨에게 “그러면 어떻게 하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링컨은 이렇게 대답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한일서 5:14~15)


2014년 8월 21일 목요일

하나님의교회에서 지키는주간예배 안식일은 무슨요일 일까?

하나님의교회에서 지키는 주간예배 안식일은 무슨요일 일까?

하나님의교회에서는 안식일예배를 봅니다
은혜롭게 지키셔서 안식의 축복누리세요~

2014년 8월 20일 수요일

구원의 장소는 어디인가요? 하나님의교회

구원의 장소는 어디인가요?


하나님의교회는 절기지키는 시온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처소입니다~

2014년 8월 19일 화요일

하나님의교회 * 새언약안식일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명이다?

하나님의교회에서 지켜지는 새언약안식일이 정말로 하나님의 계명일까요?
당연하지요~ 새언약안식일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새언약안식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날입니다.
하나님의교회에서 주장하는 새언약안식일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명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교회는 새언약안식일을 지킵니다.
하나님의교회 ∑ 새언약안식일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일, 월, 화, 수, 목, 금, 토.



하나님께서 지키라 하신 안식일은 무슨 요일에 해당할까요.


하나님께서 특별한 날로 정하신 날이 일곱째 날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주간의 끝날인 제칠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람들도 일년 365일을 다 특별한 날로 기념하지는 않습니다. 그중 아주 특별한 날들만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일곱 요일 중 어떤 날에 해당할까요.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명하신 안식일이 일요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일곱째 날은 요일상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입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시간상 겨우 하루 차이지만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판가름하고 생명과 사망을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되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31:13~15).



안식일이 요일상 ‘토요일’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성경과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 (마가복음 16:9)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성경버전인 개역한글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 후 첫날’‘안식일 이튿날(다음 날)’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을 공동번역에서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고 후에 도입된 요일제도를 적용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일요일 이른 아침,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뒤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안식일 다음 날’을 가리켜 일요일이라고 하였으니, 그 전날인 안식일은 당연히 토요일이 되는 것입니다.


금성출판사인 국어사전을 살펴보시면,  일요일은 ‘칠요일의 첫째 날’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토요일은 ‘일요일로부터 일곱째 날, 주말(週末)’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달력을 보아도 일곱째 날이 토요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일순으로 이루어진 달력을 보면 첫째 날은 일요일이며, 일곱째 날은 토요일입니다.


영어사전도 예외는 아닙니다. 영어사전은 ‘한 주 즉, 7일의 주기는 일요일을 시작으로 하여 토요일에 끝난다(Week: a 7-day cycle beginning on Sunday and ending on Saturday)’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 주의 시작은 일요일이고 마지막 날인 일곱째 날은 토요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일요일은 일곱째 날이 아니라 ‘한 주의 첫날(sunday: the first day of the week)’, 토요일은 ‘한 주의 일곱째 날(Saturday: the seventh day of the week)’이라고 되어 있습니다(Merriam Webster’s Collegiate Dictionary 참고).


 성경의 안식일은 일곱째 날로 요일상 토요일입니다. 시대가 변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일은 바뀌지 않습니다. 창조주의 기념일인 안식일은 창세 때부터 일곱째 날이었고, 구약시대에도, 2천 년 전에도 일곱째 날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일곱째 날입니다.


 새언약안식일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새언약안식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날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교회는 새언약안식일을 지킵니다.
 하나님의교회에서 지켜지는 새언약안식일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이처럼 소중한 새언약안식일을 온전히 지키어 하나님께서 주시마 약속한 축복 을 받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 8월 18일 월요일

어머니께 듣는 '힘내'라는 말 가장 정다운 말!


오늘도 부족한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시고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늘어머니가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힘이 납니다 '힘내!' 우리도 격려와 위로를 시온에 날리는 아름다운 모습이되어요~

2014년 8월 16일 토요일

종교재판과 마녀사냥*로마카톨릭의 정체*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바티칸. 바티칸은 0.44km2의 작은 영토와 1,000명이 채 안 되는 인구로 이루어진 초소형 국가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세계 10억 카톨릭 신자들에게는 물론, 전 세계에 미치고 있다.

교황은 세계 3대 종교를 비롯해 아프리카 원시종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교 지도자들과 손잡은 자리에서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평화의 사도’라는 입지를 다지기도 했다. 그러나 중세에 카톨릭이 걸어온 발자취를 보면 ‘평화의 사도’로 불리는 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위선적인지 확인할 수 있다.

중세시대 로마 카톨릭은 유럽 지역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당시의 카톨릭은 매우 타락했고 잔혹했다. 그 타락상과 잔혹성을 신랄하게 증명하고 있는 역사가 바로 ‘종교재판’이다. 종교재판을 위해 설치된, ‘거룩한 사무소’라고 불렸던 이단심문소(異端審問所)는 초국가적 통치기관으로서 이단자들에게 잔인한 고문과 처형을 자행했다.

종교재판소를 최초로 창설한 교황은 인노첸시오 3세다. 당시 프랑스의 알비와 툴루즈를 중심으로 카타리파(알비파)가 교세를 확장하여 카톨릭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자, 이들을 박멸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고안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단심문소는 교황이 자기 뜻대로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만든 기구였다.

1233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던 종교재판을 공식화하여 도미니크수도회의 수도사를 이단심문관으로 임명했다. 1252년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박멸에 관하여’라는 교서를 내려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 사용을 허락했다.

이단자들만 재판하던 카톨릭이 민중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던 마녀재판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15세기 무렵부터다. 1484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독일에서 유행하던 마술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마녀사냥이 시작됐다.

마녀로 고발당하면 여지없이 기소되어 이단심문소로 연행됐다. 심문관들은 다양하고 잔인한 고문을 통해 용의자에게 자백을 강요하거나 증거를 날조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잡혀온 사람들에게 죄를 인정하라고 강요했다. 예를 들면, 어떻게 마녀가 되었는가, 얼마 동안 마녀 짓을 하였는가,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를 입혔는가, 어느 악령을 섬기는가, 마법 집회의 참석자와 공범자는 누구인가, 어떻게 공중을 날 수 있는가, 악령과 결합하여 몸에 어떤 표시가 남았는가 등이었다.

대부분은 무고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죄를 인정할 리 없었지만, 그럴 경우 더욱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다. 고문기구와 그 방법들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밧줄로 묶어 도르래를 이용해 공중에 매달았다가 갑자기 바닥에 내동댕이쳐 신체를 상하게 하는가 하면, 사람 몸통 크기의 철제도구 안쪽에 쇠꼬챙이가 돋아 있는 이른바 ‘블랙 버진’에 가두기도 했다. 송곳을 박은 큰 롤러에 묶은 채 돌리기도 하고, 손발톱을 뽑거나 고문기구로 손마디나 발가락을 뭉개기도 했다. 귀나 입에 끓는 납을 붓기도 하고, 살점이 튀도록 채찍질을 하고, 눈을 빼는 일도 있었다. 못이 박힌 철제의자에 앉힌 뒤 밑에서 불을 때기도 하고, 가시 박힌 신발을 신게 하거나, 불에 달군 쇠막대로 지지는 등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잔혹한 방법들을 동원해 고문을 가했다.

심문관들은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것이므로 만약 죄가 없다면 하나님이 구해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굳이 자백을 하지 않아도 마녀의 증거를 들이대며 악랄하게 고문했다. 용의자들의 손발을 묶고 강이나 늪, 호수 등에 던졌는데 이때 만약 가라앉아 죽으면 결백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이 그를 받아들인 것으로 간주하고, 물위에 떠오르면 “악마는 자기를 경배하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마녀가 맞다”라며 즉시 처형했다. 고문을 당해 죽거나 사형을 당해 죽거나 죽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악마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 사람들을 완전 나체로 만들어 체모, 항문, 음부를 조사하고 머리카락에서 치모까지 모조리 깎거나 고문대에 묶어놓고 바늘로 가슴과 혓바닥, 심지어 성기 속까지 찔러댔다. 고통을 느끼면 마녀라고 억지를 부렸다. 대개는 극심한 고통 때문에 저절로 얼굴을 찡그리게 되고 결국 마녀라는 판정을 받고 화형 또는 교수형을 당했다.

역사가들은 종교재판, 이단심판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된 마녀사냥은 상업적인 목적을 띠고 있었다고 말한다. 마녀 혐의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체의 비용을 직접 지불해야 했다. 판사 인건비, 고문도구 대여료, 고문 기술자 급여 등 체포부터 재판에 소요되는 비용을 용의자가 지불하도록 규정돼 있었고, 마녀로 확정 판결을 받을 경우는 사형을 집행하는 데 드는 비용, 관값뿐 아니라 ‘마녀세’라 이름한 세금을 교황에게 내야 했다. 심지어 사형과 함께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다.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교황과 고문관들이 상속인이 되는 셈인데, 돈 많은 과부들이 주로 마녀로 몰렸던 이유가 이 때문일 것이다.

19세기 이탈리아, 스페인을 끝으로 종교재판을 폐지하기까지 약 600년 동안 5천만 명에서 7천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매일 230여 명을 죽였다는 얘기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가장 거룩하고 성스럽게 믿는다고 자부하는 카톨릭의 이야기다.

2014년 8월 15일 금요일

우분투(UBUNTU)

우분투(UBUNTU)

한 인류학자가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을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그는 아이들을 불러 모은 뒤, 재미있는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나무에 매달아 놓고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이 그것을 차지하는 게임이었다.
그런데 게임 설명을 하고 “시작”을 외치자마자 그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이들이 각자 앞다퉈 달려가는게 아니라 모두 함께 손을 잡고 가서 정답게 나누어 먹는 것이었다.
인류학자는 물었다.
“왜 모두 함께 갔니? 1등으로 가면 다 가질 수 있을 텐데.”
아이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분투!”
그리고 한 아이가 이렇게 덧붙였다.
“다른 사람이 모두 슬픈데 어떻게 한 명만 행복해질 수 있나요?”
 ‘우분투’란, 반투족 말로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편 133:1~3)
        (패스티브닷컴)    https://www.pasteve.com/?m=bbs&bid=dayword&uid=23



 

재림주도 오직 예수?

재림주도 오직 예수?
안상홍님께서는 마지막 때도 ‘오직 예수’라는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셨을까.
하나님의교회를 비방하는 몇 명의 사람들은 “하나님의교회에서 재림 그리스도로 믿는 안상홍님께서도 예수라는 이름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며 안상홍님께서 쓰신 책자 중 일부분을 제시한다.

그런데 말세에는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나온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에는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나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예수 초림 때나 마지막 때나 예수님의 이름으로만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과 생명수의 샘, 12장 성삼위일체에 대하여)

그렇기 때문에 ‘안상홍’이란 이름으로 구원받길 바라는 하나님의교회는 자신들이 믿는 구원자의 말씀조차 따르지 않는 단체라는 주장이다. 과연 그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의교회가 안상홍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일까.

예수님은 승천하셨다가 다른 이름으로 오시는 것을 가리켜 내가 가서 보혜사를 보내겠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과 생명수의 샘, 13장 성령에 대하여)

안상홍님께서 쓰신 동일 책자의 다른 부분이다. 성령 곧 재림 예수님에 대한 설명인데 여기에서 안상홍님께서는 분명 예수님께서 ‘다른 이름’으로 오신다고 설명하셨다. 예수가 아닌 다른 이름이다. 어떻게 된 것일까. 어떨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고 또 어떨 때는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 있다’고 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이름으로 구원을 주시겠다는 의미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요엘 2:32)’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다른 이름을 주시는 것은 당연히 그 ‘다른 이름’을 믿고 불러서 구원을 받으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안상홍님께서는 마지막 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이 있다고 하신 것일까. 이는 말씀의 주제가 성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부분 중 일부라는 사실을 알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성자이신 예수님의 이름이나 성령이신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나, 모두 동일한 분이신 예수님의 이름이다. 요한계시록의 기록을 보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요한계시록 3:12)

여기서 ‘나’는 예수님으로, 예수님의 ‘새 이름’은 곧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다른 이름으로 오신다고 해도 성경의 증거대로 오신다면 그분의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이다.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교회는 ‘안상홍’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예언과 성취를 통해서 ‘안상홍’이란 이름이 예수님의 새 이름 곧 다른 이름이란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제시한 안상홍님의 말씀은 ‘성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의 일부로, 마지막 때도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부분은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자라는 뜻’이란 제하의 결론에 해당한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자라는 뜻

구약성경에는 여호와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고 여러 번 기록되어 있다.

사 43장 11절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하였으며

사 45장 21절 …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하였으며, 호세아의 글에도

호 13장 4절 그러나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예수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고 하였다.

행 4장 11~12절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다. 그리고

마 1장 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였으니 예수라는 이름이 구원자라는 이름이다.

그런데 말세에는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나온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에는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나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람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예수 초림 때나 마지막 때나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글은 ‘각 시대마다 그 시대에 임하신 구원자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받는다’와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이라는 중간 제목을 유의해서 봐야 한다. 성부시대 구원자는 여호와였고, 성자시대 구원자는 예수였다. 시대마다 구원자의 이름이 바뀐다는 특징이 있다. 거기에 예수님의 이름의 뜻은 구원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마지막 시대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받게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는가. 마지막 시대에 오시는 구원자의 이름으로만 구원받게 된다는 뜻이다. 시대마다 구원자의 이름이 바뀐다고 했으므로 ‘예수’가 아닌 예수님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3장에 ‘예수님의 새 이름’이 있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교회가 마지막 시대인 오늘날은 안상홍님의 이름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 시대 구원자는 안상홍님이기 때문에, 오직 안상홍님의 이름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성자시대 때 아무리 여호와 이름을 불러도 구원받을 수 없었던 이치와 같다.

이처럼 구원자를 알기 위해 힘쓰기보다 타 교회를 비방하는 데만 혈안이 되면 이런 곡해를 하게 된다. 저자의 의도와 달리 일부분만을 발췌해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저자가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 죄의 결과가 얼마나 크겠는가(요한계시록 22:18~19).

2014년 8월 14일 목요일

위대한 모성의 시작 하늘어머니로 부터입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편안한 곳은 바로 어머니의 입니다.

자녀들에게 영원한 안식처가 되어주시고 영생을 허락해주시려
존귀하신 하늘어머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이땅에 오셨습니다.

어머니하나님을 영접하셔서 어머니품에서 위로받고
영생의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2014년 8월 13일 수요일

사도들의 사상*영혼*하나님의교회

사도들의 사상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우리 영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영혼에 대한 지식은 인류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우치게 하고, 우리가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지 정확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교훈과 함께 흙과 생기, 즉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지음받은 인간 창조의 원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창세기 2:7).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구분하셨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육신뿐만이 아니라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따랐던 사도들은 영혼에 대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을까. 사도들의 모든 사상은 예수님의 교훈을 통해 정립되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세워졌다. 사도들의 사상을 살펴보면 예수님께로부터 우리 인간의 영혼이 존재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먼저, 바울의 사상을 살펴보자.

바울은 우리 육체가 영혼의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육체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린도후서 5:1)

우리의 영혼은 현재 임시용으로 사용하는 장막집, 즉 육체 속에 살지만,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영원한 집, 즉 영광스러운 부활을 입은 영혼은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린도후서 5:6~9)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예수님은 영의 세계에 거하시고 우리는 육의 세계에 거하고 있으니 육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예수님과 따로 거하는 것이며, 자신과 성도들의 소원은 빨리 육신을 떠나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 말씀 속에서 육신에 거하는 것은 무엇이고 육신을 떠나는 존재는 무엇이겠는가. 몸을 떠나고 싶다고 한 존재는 바울의 영혼이다. 이는 그의 육체가 생명의 본질이 아니라 육체 속에 있는 영혼이 그의 본질이라는 의미다. 영혼의 존재를 확실히 깨달았던 그는 잠시 살다 떠날 육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될 영혼을 위한 삶을 살았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립보서 1:21~24)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라는 의미는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라는 말이 설명하듯이 육신에서 떠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육신에 거하기도 하고 육신에서 떠나기도 하는 존재는 무엇이겠는가. 바로, 바울의 영혼인 것이다. 바울의 또 다른 기록을 보자.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린도후서 12:1~3)

바울은 14년 전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던 사실을 언급하며 그의 영혼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신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였다. 이 말씀 가운데 나타난 바울의 사상은 어떠한가. 그가 만약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라는 표현을 했을 리 만무하다. 이는 바울이 계시를 볼 때, 자신의 영혼이 몸을 빠져 나와 낙원에 갔었는지, 아니면 몸과 함께 갔었는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에게 몸과 영혼이 존재한다고 여러 구절들을 통해 증거하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주셨던 말씀을 늘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한복음 21:18)

베드로는 복음의 생애를 마무리하기 직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주셨던 말씀을 추억하면서 남아있을 성도들을 염려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베드로후서 1:13~14)

베드로는 바울과 동일하게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장막을 벗어난다’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장막을 벗어나는 것을 가리켜 ‘자신이 떠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베드로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베드로는 수천 년 전 노아시대 죽었던 사람들의 영혼이 그때까지도 살아 있으며 옥에 갇혀 있다고 증거했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 (베드로전서 3:19~20)

사도 요한도 이 땅에서 순교당한 영혼들이 하늘에 있는 모습을 계시로 보았다.

다섯 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하니 (요한계시록 6:9~10)

육신의 죽음 이후에 존재하는 것은 영혼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곤 한다. 나의 주인은 육체가 아니라 육체 속에 갇혀 있는 영혼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의 생각이었다.

사도들의 표현대로 ‘내’가, 엄밀히 말해 ‘내 영혼’이 육체라는 천막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캠핑을 가거나 야영을 할 때 천막에서 지내는 삶은 단 며칠간이다. 천막으로 비유된 육체 속에서의 삶도 마찬가지로 잠시 잠깐이다. 비록 지금은 죄로 인하여 천막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영원한 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삶의 비중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야 할지 답은 명확하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린도후서 4:18)

2014년 8월 12일 화요일

천사보다 낮은 모습*하나님의교회 안상홍님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이방의 압제에서 구원하고 세계 열방 중에 뛰어나게 해 줄 것이라 예언된 그리스도를 애타게 기다려왔다. 그러나 2천년 전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그토록 간절히 기다렸던 그리스도를 배척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다. 조상 대대로 수천년간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배워왔던 유대인들이 왜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성경 예언대로 나타난 그리스도는 그들이 상상하던 모습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본래 그리스도는 천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하신 하나님이다.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히브리서 1:4)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는 잠깐 동안 천사보다 낮은 모습으로 임하셨다.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9)

천사보다 낮은 모습은 바로 사람의 모습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5~8)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유대인들은 천사보다 높으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리스도로 오실 때도 당연히 천사보다 높은 영광의 모습으로 임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보통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사람의 모습, 즉 오히려 천사보다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하셨다.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고정관념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했던 것이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마가복음 6:3)

그러나 고정관념을 버리고 오직 성경의 예언을 통해 그리스도를 바라본 자들은 비록 천사보다 낮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으나 그 속에 감추어진 존귀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올바로 알아보고 영접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14)

그런데 2천년 전 오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두 번째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28)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두 번째 나타나신다는 예언은 첫 번째 오실 때와 같은 모습으로 오신다는 예언이다. 즉, 첫 번째와 같은 모습인 천사보다 낮은 모습, 사람의 모습으로 임하신다는 말씀이다. 예언에 따라 그리스도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의미하는 바 이스라엘 독립의 해인 1948년에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셔서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수많은 사람들도 2천년 전과 마찬가지로 천사보다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당연히 영광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는 고정관념 속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2천년 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고정관념과 달리 천사보다 낮은 모습으로 임하신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깨닫고 구원에 이르기 위한 전제 조건이 바로 사람의 생각과 고정관념을 버려야 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 55:8~9)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다.

이 시대 구원자이신 성령과 신부를 알아보고 영접하는 특별한 은혜는 2천년 전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자기 생각과 고정관념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성경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이다.

이단이라 불렸던 초대 하나님의교회

이단이라 불렸던 초대 하나님의교회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일이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던 사도 바울을 고소해 법정에 세웠다. 이단이란 이유에서다(사도행전 24:1~14).

어째서 사도 바울은 이단이란 오명을 쓰게 됐을까. 교권을 잡고 있던 유대교의 신앙(교리)과 많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오직 영으로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으며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다고 여겼다. 반면 사도 바울(초대 하나님의교회)은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전했다. 또한 모세를 통해 세웠던 옛 언약을 신앙의 중심에 뒀던 유대교와 달리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 언약을 중심에 뒀다. 이같이 상반된 신앙의 차이로 유대교인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사도 바울을 법정에 세우기에 이르렀다<표 참조>.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예수님)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로마서 9:5)

바울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증거했다. 왜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증거했을까? 예수님께서 태어나기 700년 전 이사야가 기록한 예언에 그 근거가 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예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9:6)

이런 이유로 바울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에 따라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님을 믿었던 것이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새 언약을 지키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근거로 하나님께서 옛 언약을 폐하고 새 언약을 세워주실 것이라고 예언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기록이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예레미야 31:31)

이는 옛 언약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던 유대교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의미다. 이 말씀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유대교를 떠나 하나님의교회로 몰려왔다. 유대교는 반발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예수님을 좇는 모든 하나님의교회 교인들을 이단이란 죄명으로 잡아들이자는 것.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법정에서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마치 오늘날 하나님의교회와 기성교회를 보는 듯하지 않은가. 하나님의교회는 성경의 예언에 따라 육체로 오신 재림 그리스도 안상홍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구원자로 믿는다. 또한 하나님만이 세워주실 수 있는 새 언약을 지킨다. 이런 이유로 기성교회는 하나님의교회를 이단이라고 비난한다<표 참조>. 하지만 때가 되면 역사는 말해줄 것이다. 오늘날 사도 바울이 이단이 아닌 참 선지자라고 칭송을 받는 것처럼.


2014년 8월 11일 월요일

다윗의뿌리 안상홍님!!세우신 하나님의교회

 다윗의뿌리가 세우신 교회



계5:1 "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의 오른손에 이 있으니
안팎으로 썻고 일곱 으로 봉하였더라.....
 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그 일곱떼시리라 하더라 "
사도 요한은 인봉되니 성경의 비밀다윗의 뿌리만이 알려줄 수있다고 예언하고 있다.
성경의 비밀이 인봉된 채로 있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하무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다윗의 뿌리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계22:16 "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나는 다위의"
예수님이 다윗의 뿌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기록된 책이다.
성경의 비밀을 알려주실 다윗의 뿌리는 '재림 예수님'인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일다윗을 찾아야 한다고 증거하고 있다.
호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위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말일에 다시 오신 다윗의 뿌리는 무엇을 통해 알아볼 수 있을까?
사55:3 " ...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을 세우리니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살 길, 구원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며 다윗에게
영원한 언약을 허락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사야서는 다윗이 죽은 후에 기록된
예언서이므로여기서 말하는 다윗은 예언적 다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영원한 언약'이란 무엇일까?
히13:20 "양의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영원한 언약의 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로 세우신 언약은 유월절 새언약이다(마26:17~28,
막14:12~24,눅 22:7~20) 즉 말일에 등장할 재림 다윗
반드시 새 언약 유월절을 가지고 등장하셔야 하는 것이다.

새언약 유월절을 지키는 곳은 하나님의교회가 유일하다.
이 시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봉되었던 생명의 비밀인
새 언약은 개봉하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친히 세워주신분이 안상홍님이시다.
안상홍님은 성경의 모든 예언을 따라 말일에 등장하신 다윗의뿌리입니다.
안상홍님 영접하셔서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받으시길바랍니다...



2014년 8월 9일 토요일

어머니하나님*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을 두 가지로 나타내고 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동의 그곳이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보좌에 앉을지어다”,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니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성경은 수없이 많은 곳에서 예루살렘을 이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는 결코 지금 중동에 있는 예루살렘이라 할 수 없다. 성벽 하나 남아 있는 중동의 예루살렘이 보좌에 앉을 수도 없으며, 찬송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위의 성경구절에 나타난 ‘예루살렘’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에서는 예루살렘을 두 가지로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중동의 그곳이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사도 요한은 계시 가운데 구원을 베푸시는 성령과 신부를 보았다. 성령 하나님과 신부께서 주시는 생명수가 값없이 인류에게 전해지는 장면에서 성경은 끝이 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바로 전장에서 여기 나타난 신부가 누구인지 무척 궁금해 했다. 그리고 결국 천사를 통해 신부에 대해 확인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계시록 21:9~10)

사도 요한을 데리고 간 천사가 보여준 신부는 다름 아닌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던 사도 요한이 이를 보고 마치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라고 기록했다(요한계시록 21:2). 분명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아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하늘에서 내려온, 사도 요한이 보았던,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그 예루살렘은 바로 우리의 어머니시다. 그런데 이 짧은 성경 구절 속에 우리는 여러 가지 의문이 든다. ‘우리의 어머니’라는 말의 뜻은 무엇이며, ‘왜 예루살렘은 하늘에서 내려왔을까’ 하는 것과 또 ‘우리’라는 존재는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먼저 ‘어머니’에 대해 살펴보자.

지구에 존재하는 어떤 생명체든 그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모체가 필요하다. 즉 생명은 어머니로부터 이어 받는다. 육신의 생명은 육신의 어머니에게서, 영의 생명은 바로 영의 어머니를 통해서다. 성경에 과연 영의 어머니가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6~27)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겠다고 하셨다. 하나님 자신을 말씀하시는데 왜 ‘나’라고 단수의 표현을 쓰지 않고 ‘우리’라는 복수의 표현을 쓰셨을까. 또한 여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도 ‘남자’와 ‘여자’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이 ‘남자’와 ‘여자’라면 하나님의 형상 안에는 분명 ‘남자의 형상’과 ‘여자의 형상’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남성적 형상의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여성적 형상의 하나님은 당연히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 하시기에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영의 생명을 위해서는 분명 어머니 하나님이 계셔야 하고, 그 어머니 하나님의 등장을 성경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왜 예루살렘은 하늘에서 내려왔을까’ 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예루살렘이 ‘하늘 어머니’라는 데 그 답이 있다. 어머니의 존재는 생명을 잉태하고 낳으며 기르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희생한다.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셔야 할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께서 하늘에 계시지 않고 이 땅에 내려온 이유는 바로 이 지구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 때문이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요한일서 2:25)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인 영생은 영의 어머니가 아니면 우리에게 주실 수 없기에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결국 희생이라는 길을 택하셨던 것이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 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 (이사야 50:1)

하늘에서 이 땅까지의 멀고 먼 여정을 오로지 자녀 사랑으로 감내하신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시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유를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이 성경구절 속에 담긴 뜻 중에 마지막으로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라디아서 4:28~31)

‘우리’라는 대상은 이삭과 같은 존재다. 이삭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축복해 주셨다. 아브라함 가정에는 이삭 외에 하갈이라는 종의 몸에서 장자인 이스마엘을 얻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직 이삭에게만 유업을 주겠다 약속하셨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창세기 17:18~19)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상속자의 조건은 아버지가 낳은 자녀가 아니었다. 만약 아버지의 피만 이어 받아도 상속자의 조건이 된다면 14년이나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이 당연히 상속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 하셨다. 이는 상속자의 조건이 바로 어머니에게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어머니인 사라를 통해 태어난 자만을 상속자로 정하겠다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의 가정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이삭과 같은 자녀라고 하신다. 예루살렘 어머니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가 구원의 약속을 받은 자라는 것을 밝혀두셨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라디아서 4:31)

하늘나라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종의 자녀가 아닌 오직 어머니로 말미암아 상속을 약속받은 이삭처럼 하늘 어머니를 믿음으로 구원을 약속받은 자녀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어머니라고 하셨다. 우리는 곧 이삭과 같이 어머니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자녀라는 뜻이다.

예루살렘 어머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가 될 수도 없고 영생을 받을 수도 없다. 하나님의 약속인 영생은 최종적으로 어머니로 말미암아 완성되기 때문이다.

2014년 8월 8일 금요일

다윗의 뿌리가 세우신 교회*하나님의교회*

다윗의 뿌리가 세우신 교회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성경은 가장 오랫동안 인류에게 읽혀온 스테디셀러(Steady Seller)다.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6,500개의 언어 가운데 성경은 약 2,50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이렇게 많은 언어로 번역되면서 세상에는 수많은 교파들과 수많은 교회들이 저마다 조금씩 다르게 성경을 해석하고 그 교리를 ‘진리’로 가르치고 있다. 과연 그 많은 교회 중 어느 교회가 성경을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해석하고 있을까. 성경에서는 오직 ‘다윗의 뿌리’만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해주실 수 있다고 기록한다.

다윗 왕[플랑드르화파 作, 16세기경]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또 보매 힘 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니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5:1~5)

요한은 밧모섬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인봉된 성경의 비밀을 개봉해주시는 ‘다윗의 뿌리’에 대해 언급했다. 예언 가운데 ‘보좌에 앉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오른손에 가지신 책’은 당연 성경이다. 그런데 이 계시 속에서 요한은 성경이 어느 누구도 펴거나 보거나 할 수 없도록 ‘인봉’돼 있다고 말했다. 성경의 비밀을 아무도 볼 수가 없어 답답한 마음에 크게 울었던 요한에게 한 사람이 다가와 ‘다윗의 뿌리’만이 인봉된 성경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성경의 비밀은 유명한 목사도, 신학자도 아닌 오직 ‘다윗의 뿌리’만이 풀 수 있다. 즉, 우리는 ‘다윗의 뿌리’가 세운 교회에 가야 성경을 올바르게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지막 때 다윗을 구하고 경외하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호세아 3:5)

말일(末日)에, 즉 마지막 때에 다윗을 경외하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의 은총으로 다가갈 수 없기에 이 시대 우리는 반드시 다윗의 뿌리가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6)

성경의 모든 비밀을 올바로 해석해주고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다윗의 뿌리는 바로 ‘예수님’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5장에 등장하는 다윗의 뿌리는 과연 ‘초림 예수님’일까 ‘재림 예수님’일까. 물론, 요한계시록은 이미 초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가 하늘로 올라가신 후 쓰여졌기 때문에 초림에 대한 예언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더욱 확실한 해답은 ‘인봉’이라는 단어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예언은 초림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구원의 말씀이 인봉된 후 다시 개봉할 역사에 대한 예언인 고로, 다윗의 뿌리는 재림 예수님이다. 그런데 초림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 수많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도 함께 등장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마태복음 24:3, 24)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다윗의 뿌리인 재림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다윗의 뿌리만이 가지고 오는 ‘확실한 증표’로 해결된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 (이사야 55:3)

다윗에게만 주신 확실한 은혜는 영혼을 살리는 ‘영원한 언약’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뿌리인 재림 예수님은 반드시 영원한 언약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영원한 언약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옛 언약이 아니다. AD 80년경 쓰인 ‘히브리서’는 이 영원한 언약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히브리서 13:20)

히브리서는 ‘영원한 언약’에 대해 논하며 ‘피’를 언급하고 있다. 이는 영원한 언약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피가 내재돼 있어야 함을 뜻한다. 때로는 아주 중요한 약속을 하며 변치 않겠다는 의지로 ‘혈서’를 쓰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시며 피로써 절대 변치 않는 ‘영원한 언약’을 세워주셨다. 한정적이고 유한하지 않은, 무한하고 영원한 ‘언약의 피’는 무엇일까.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6~28)

이 장면은 유월절 성만찬 자리다.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에서 떡을 일컬어 ‘당신의 몸’, 포도주를 일컬어 ‘당신의 피’라고 하시며 이를 보다 확실하게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반드시, 꼭, 확실하게 죄를 사해주시고 이로써 구원을 주시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와 동일한 장면을 묘사하며 누가는 ‘새 언약’이라고 기록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20)

따라서 영원한 언약은 예수님께서 피로 세워주신 유월절 새 언약이다. 다윗이 가지고 올 확실한 증표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말일에 새 언약 유월절을 가지고 나타나신 분은 요한이 계시를 통해 보았던 다윗의 뿌리가 된다. 다윗의 뿌리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없다. 만약 다윗의 뿌리가 아니면서, 즉 새 언약 유월절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면서 성경을 해석한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베드로후서 3:16)

다윗의 뿌리로 오시는 재림 예수님은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 어느 누구도 해석할 수 없었던 성경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분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키고 있는 다윗의 뿌리가 세우신 교회라야 올바로 성경을 해석하는 진리 교회다.

2014년 8월 4일 월요일

2014년 8월 3일 일요일

포기하지 않는 이유

한 사냥꾼이 토끼 사냥에 나섰다.

사냥꾼은 토끼를 잡기 위해 수많은 사냥개를 풀었다. 사냥개들은 토끼를 쫓기 시작했다.

사냥개들 중 맨 처음으로 토끼를 발견한 사냥개가 마구 짖어대며 토끼를 향해 쫓아갔다.

그러자 토끼를 보지 못한 다른 사냥개들도 덩달아 짖어대며 그 사냥개를 따라 달렸다.

얼마 후, 토끼를 직접 보지 못하고 뒤따라갔던 개들은 하나 둘 달리기를 멈추었다.

어떤 개는 장애물이 나타나자 곧바로 쫓기를 포기하며 되돌아갔다.

그러나 유일하게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사냥개가 있었다.

맨 처음으로 토끼를 발견한 사냥개였다.

잠시 후 그 사냥개는 목표물인 토끼를 잡을 수 있었다.

토끼를 잡은 사냥개와 도중에 포기했던 사냥개의 차이는 이것이었다.

직접 목표물을 보고 확인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로마서 10:16~17)